의치한약수. 즉, 의사-치과의사-한의사-약사-수의사. 의료계열 전문직에 대한 대학 수험생들 선호도 순서다.
그런데 최근, 수의사 선호도가 약사 선호도를 넘어섰다는 얘기도 들린다. 대학 수험생 합격 커트라인이 수의대가 약대보다 높아졌다는 것. 그만큼 수의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급상승하고 있다. “동물병원이 약국이나 한의원보다 낫다”는 얘기도 이미 한참 됐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수의계를 이끌어갈 미래의 주역, 수의대생들은 졸업 후 어떤 진로를 생각하고 있을까?
우리나라 수의대는 10개다. 서울대와 지역 거점 국립대들에 수의대가 1개씩 있다. 사립대로는 건국대가 유일하다. 여기 10개 대학 졸업생 500명 정도가 매년 수의사(DVM, Doctor of Veterinary Medicine) 면허를 딴다.
그 중 대부분은 동물병원 임상 수의사의 길을 걷는다. 수의대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이 동물병원, 올해 2월 현재, 전국 동물병원 4천900여개에 근무하는 수의사만 약 7천600여명이다. 우리나라 수의사 전체의 35.2%.
하지만 은퇴자를 포함해 지금 현재 수의사 면허를 갖고 있는 이들 모두(약 2만1천여명)를 대상으로 한 비율일 뿐. 현실은 집중 현상이 훨씬 더 심하다. 최근엔 수의대 졸업생 거의 전부가 동물병원 임상 수의사를 희망한다.
그것도 수도권 대도시. 같은 동물병원이라도 지방 소도시는 수의사 구인난이 시작된 지 오래됐다.
전체 수의사의 35%가 동물병원에…”하지만 대도시 동물병원은 포화 상태”
그런데, 동물 수의계는 ‘전문의'(specialist/diplomate) 제도가 없다 보니, 사람 의사들과 달리 인턴~레지던트 코스로 가는 게 아니라 바로 임상 현장으로 뛰어든다. 의사로 치면 100% 모두 ‘일반의'(GP, General Practitioner)다. 내과 외과 안과 피부과 같은 ‘전문과목’이 따로 필요 없다. 거꾸로 얘기하면 동물병원 차리기가 그만큼 쉽다는 얘기도 된다.
문제는 최근 동물병원 수가 늘고, 병원들간 경쟁이 격화되면서 임상 수의사들의 미래가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것. 면허만 딴 상황이니 수련(인턴)하는 셈 치고, 동물병원에 취직하면 월급도 많지 않다. 2~3년 견디면 대기업, 중견기업 취직한 친구들 비슷해지는 정도다.
그렇다고 덜컥 동물병원을 차리기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지금도 서울 등 수도권 대도시에선 한 거리에 동물병원이 둘셋씩 있는 걸 자주 볼 수 있다.
오는 22일, 경북대 글로벌플라자에선 이색적인 프로그램이 하나 열린다. 수의대생들을 위한 진로 특강. 한국임상수의학회(회장 오태호)의 ‘2022 춘계학술대회’가 내건 프로그램이다.
전체 학술대회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배정한 메인(main) 프로그램. 전문적인 학술 결과들이 발표되는 ‘학회’, 그것도 대학 교수들과 동물병원 원장들의 ‘정기 학술대회’에서 “아직 회원도 아닌” 학부생들을 위한 진로특강 세션을 메인에 배치하는 것은 특별하다.
오태호 학회장(경북대 수의대 교수·사진)은 “한국 임상수의학의 미래 주역이 될 수의과대학 학부생들을 위한 특별 강의를 마련했다”면서 “이를 위해 지난 3월, 약 300여명 수의대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여, 학생들이 듣고 싶은 강의 주제와 강의 형태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고 했다.
선배 수의사들은 여기서 1인 동물병원 수의사의 생활(장봉환 원장)부터 2차 동물병원 수의사(허찬수 원장), 미국 수의사(이연혜 교수), 임상대학원 석•박사 과정(정동인, 이해범, 최지혜 교수)의 이점과 현실, 그리고 준비해야 할 것들을 자세히 들려준다.
또 황준석 오석헌 김미령 박영우 원장 등은 ‘내가 이 길을 선택한 이유’라는 주제로 각각 말(馬) 전문, 특수동물 전문, 고양이 전문, 안과 전문 수의사가 되는 길을 소개한다.
‘전문의’ 코스가 수의대 학부생들의 1차 관심사
그런데, 이를 좀 더 들여다보면 지금 수의대를 다니는 학부생, 대학원생들의 고민이 읽힌다.
공무원이나 산업계로 가는 것보다는 동물을 직접 돌보고 치료하는 임상을 하는 것을 원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런 질환 저런 질환 다 보는, 동네의 로컬병원 원장은 피하고 싶다는 얘기다. 즉, 일반의(GP)는 이제 이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아니라는 얘기다.
임상대학원에서 석사 박사를 하는 것도, 2차 동물병원을 지원하는 것도 다 그런 맥락에서다. 이들이 벤치마킹하고 싶은 선배도 안과 전문, 피부과 전문, 외과 전문 등 전문병원이나 특화진료병원들. 대동물(大動物)을 하더라도 소, 돼지, 닭보다는 말 정도는 됐으면 한다.
수의계에 ‘전문의’ 제도 도입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이 어제 오늘은 아니다. 수의학회들이 경쟁적으로 전문의 제도를 실험하려는 상황이기도 하다. “수의계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어쩌면 당연한 흐름”이란 얘기도 들린다.
게다가 “지금 수의대 학생들의 학습 능력은 역대 최고 수준”이라고들 한다. 이들의 눈높이에 비춰보면, 지금의 수의계는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모델이 등장해야 할 때인 것은 분명하다.
반려동물과 산업동물 전문인력 수급 격차 더 커질 듯… 수의학 공공성은 누구 책임?
하지만 그 ‘똑똑한’ 친구들에게서 축산업, 즉 산업동물에 대한 관심은 뒷전이라는 사실은 마뜩찮다. 소, 돼지, 닭, 오리 등 축산물의 건강은 국민 건강, 국민 생활과도 직결된다. 우리 식량 안보와도 관련이 깊다.
그런데, 따지고 들면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수의계 전체 현실이기도 하다. 대한수의사회 등에서 ‘농장전담 수의사제’ 도입을 부르짖는 이유이기도 하다. “힘만 들고, 돈은 안 되는” 그 길을 아무도 가려하지 않기 때문.
수의과대학들도 이를 방치하고 있는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수의학의 사회적 역할, 그리고 ‘공공의료’에 대한 책임을 가르치고, 또 현실로 구체화되도록 지도해야 할 역할이 없지 않을 것이기 때문. 물론 속사정이야 따로 있겠지만, 그래도 이들은 국민들 혈세로 만들고 키워온, 명색이 ‘국립’대학들 아닌가.